가야금 산조와 병창의 명인 강태홍은 1893년 3월 21일 전남 무안군 외읍면 교촌리에서 판소리 명창 강용안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같은 시대에 판소리로 이름을 날렸던 강남중과는 사촌간으로 어릴적부터 음악을 가까이하여 가야금과 판소리 등을 배웠다.
강태홍의 음악 스승들은 지금까지 뚜렷이 밝혀진 바 없고, 일설에 의하면 그가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였던 김창조에게 가야금을 시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강태홍의 산조는 가락의 짜임새나 음악적 특성이 김창조 계열의 산조와는 매우 달라서 최근 들어 양자의 음악적 근원과 전승맥이 서로 다를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강태홍은 19세에 고향을 등지고 대구, 경주, 부산 등 경상도 지역에 정착하여 연주활동과 교습을 주로 하였고, 1957년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도 부산에서 였다. 다만 1930년대 10년 동안은 서울로 활동지를 옮겨 조선악협회, 조선성악연구회에 참여하면서 가야금 산조와 병창 공연과 교습은 물론 창극활동에도 적극적이었고 이때에 몇 편의 음반취입도 할 수 있었다.
이 빅터 음반에 담긴 그의 산조는 1931년 10월 26일에 취입된 것으로 단지 진양조와 중모리에 그쳐 아쉽기 그지 없으나 여타의 가야금 산조와 전혀 다른 음악적 느낌은 단 몇분간의 짧은 음악을 통해서도 충분히 드러난다. 강태홍과 같은 시기에 가야금 산조와 병창으로 이름을 널리 드러냈던 정남희는 강태홍 산조를 일러 “다른 류에 비해서 개성이 있고 독특한데 장단의 뒤를 열고 가는 것이 어려우면서도 묘미가 있다”, “강태홍 가락은 장단 끝에 다음 장단을 걸고 넘어 가는 것이 특징이다” 라고 한 바 있으며 이러한 음악성은 강태홍 가야금 산조의 독창성을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강태홍은 193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새롭게 가다듬어 말년에 이르러서는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세산조시로 구성된 산조 한바탕을 완성하여 구연우, 김춘지, 원옥화, 신명숙 등에게 전수하였고, 그의 산조는 1989년 부산지방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고 보유자 신명숙을 중심으로 부산에서 결성된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 보존회’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세대 가야금 연주자들에 의하여 활발히 전수되고 있다.
강태홍의 예술과 생애는 백혜숙의 “효산 강태홍의 생애와 음악” – 한국음악사학보 제8집, 1991 이라는 글에서 소상히 밝혀진 바 있고 93년 11월 24일과 25일에는 강태홍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음악세계를 조명하는 기념 음악제 및 학술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 송혜진(음악평론가)
원반: Victor KJ-1342-A(49244-A) 진양-중모리
녹음: 1931. 10. 26